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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대신 ‘어디야?’ 삶을 뒤바꾼 생활혁명
[한겨레] [휴대전화 4000만명 시대] (상) 확 바뀐 일상
우리나라 휴대전화 가입 인구가 ‘4천만명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가입자 3990만명을 넘긴 것이 지난 9일. 업계에서는 열흘 동안 4만여명씩 증가하는 추세로 미뤄볼 때 이달 안에 4천만명을 뛰어넘을 것으로 내다본다. 1984년 ‘카폰’이 도입된 뒤 14년 만에 1천만명을 넘어서더니 10년도 안 돼 시장은 네배로 팽창했다. 이제 군인과 재소자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국민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휴대전화는 편리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개인과 개인을 잇는 촘촘한 그물망이 되어 우리 사회를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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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야, 20분 늦을 것 같아” = 토요일 저녁 서울 신촌의 홍익문고 앞. 몇십년동안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약속장소였지만 요즘엔 서성이는 발길이 뜸하다. 7~8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점 입구를 가로막아 ‘이곳에 서 있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붙을 정도였다. 이제 약속 장소는 구체적으로 정할 필요 없다. “강남역에서 전화해”라는 식이다. 약속시간도 제멋대로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자기야, 미안해. 나 20분 정도 늦을 것 같아”하면 그만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왔을까?’ 그리운 사람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초조해하는 ‘기다림의 미학’이 사라졌다.
[#2] “여보세요?”가 사라졌다 = “어디야?” “왜?” “무슨 일이야?” 등이 “여보세요?”를 대신하고 있다. 발신자 정보표시 서비스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상대가 전화를 걸어오면 받지 않기도 한다. “운전중이니 다음에 전화주시죠”라고 적당히 핑계대기도 쉬워졌다. 이미 전화를 걸어 놓고도 “지금 전화받기 괜찮으세요?”라고 눈치를 살피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통해 시간과 공간, 관계를 능동적으로 통제한다.
[#3] ‘엄지족’의 버튼은 수리중 = “어디냐”, “체육관이다”, “농구 한 게임 뛸까”, “지금 안 돼”, “그럼 언제?” 곽아무개(18·홍대부고 2년)군은 이런 식으로 하루 평균 200여건의 문자를 보낸다. 서아무개(16·홍대부중 3)군은 한 달에 1만건이 넘는 문자를 보낸다. 음성통화를 하고 남는 자투리 전파 대역을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고민 끝에 도입된 문자메시지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음성통화보다 더 중요한 소통수단이 됐다. 문자를 워낙 많이 ‘날리다’ 보니 휴대전화 버튼도 남아나지 않는다. 엘지전자 서울 마포고객서비스센터에서는 전체 수리 건수의 40%가 중·고생이고, 이중 70%가 버튼 수리다.
[#4] 문자는 ‘안심서비스’ = 지난달 유아무개(30)씨는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신 뒤 지갑을 잃어버렸다. 돈보다도 신용카드가 문제. 그러나 유씨는 분실신고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곧바로 문자메시지로 사용내역이 날아오게 돼 있어 걱정이 없었다. 분실신고를 하면 지갑을 다시 찾더라도 새 카드가 나올 때까지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 번거롭기도 하다. 엘지카드 고객 1028만명 가운데 23.3%가 문자메시지 서비스에 가입했다.
[#5] 라디오의 엽서는 박물관으로 = “정답은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세요. 번호는 ○○○○-○○○○입니다. ” 1998년까지만 해도 라디오 청취자들이 보낸 엽서를 추려 전시하는 행사가 인기였다. 청취자들은 사연이나 퀴즈 정답을 엽서에 정성스레 적어 방송국 사서함으로 보내곤 했다. 지금은 프로그램마다 하루 몇백통씩 오던 엽서 대신 1천여통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온다. <문화방송>의 장수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의 남태정 프로듀서는 “지금도 일주일에 3~4통씩 엽서가 오긴 하지만 거의 사라졌다”며 “맞춤법은 틀려도 꼬불꼬불한 글씨로 써내려간 정성을 더이상 느낄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6] 공중전화도 찬밥 시내 =공중전화 부스에는 음료수 캔과 담배꽁초 등 쓰레기만 가득하다.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광경은 이제 군부대에서나 볼 수 있다. 1999년 6411억원에 달한 공중전화 매출액은 해마다 급격히 줄어 2005년 858억원까지 떨어졌다. 공중전화 1대가 1년 내내 벌어들이는 돈이 70여만원, 하루 2000원에 불과하다.
[#7] 시계는 시계가 아니다 서울 ㄹ백화점 시계 매장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관에 온 듯 하다. 수백만~수천만원짜리 시계가 한두개씩 고급스런 유리상자 안에 진열돼 있다. 휴대전화가 손목시계의 기능을 대체하면서 시계는 패션 또는 보석이 됐다. 현대백화점 시계 바이어 김동환 대리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보는 사람들은 더이상 시계 시장의 고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8] 애들이 뭐하는지 엄마도 몰라 = 휴대전화는 ‘나만의 비밀세계’를 만든다. ㅈ아무개(42·주부)씨는 “아들이 누구랑 노는지 궁금해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보려고 했더니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았더라”며 “좀 보여달라고 해도 ‘엄마가 사생활을 침해하려 한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고 말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엄마들은 “안녕하세요? 저 민우 친구 현철인데요, 민우 집에 있나요?”라는 전화를 받고는 슬며시 웃으며 “민우는 전화예절이 참 바르구나”라고 칭찬했을 것이다. 이제 초등학생들까지 휴대전화로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엄마들이 낄 자리가 사라졌다. 김명혜 동의대 교수(신문방송학과)는 “휴대전화로 언제든지 자식들의 위치와 활동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얻는 한편, 아이가 휴대전화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엄마들이 소외당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9] ‘아주 사적인 휴대전화’ 장만하시죠? = ‘비밀’은 알려지고야 만다. 사업가 서아무개(39)씨는 “주변에서 외도를 한 커플 중 70~80%가 휴대전화 때문에 들통이 난다”고 말한다. 아무리 통화기록과 문자메시지를 샅샅이 지운다고 해도, 언젠가는 빵부스러기처럼 떨어져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서씨는 “사업하는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두셋씩 가지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아주 사적인 휴대전화’를 따로 마련해 집에는 안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동기는 사뭇 다르지만, 정치인들도 언론 등에 번호가 공개된 휴대전화 이외에 정치적 밀담을 나누기 위한 여벌의 휴대전화를 지닌 경우가 많다.
[#10] ‘수사반장’은 꿈도 못꾸던 통신수사 = 서울경찰청의 한 간부는 틈틈이 이동통신사 직원들에게 술을 산다. 경찰이 접대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사이버수사를 오랫동안 하면서 이동통신사의 협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통신수사는 이제 범죄수사의 기본. 지난달 24일 국민은행 권총강도를 붙잡은 것도 그가 사용한 휴대전화 덕분이었다. 서울의 한 경찰서 형사과장은 “사건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피해자와 범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파악한다”며 “거의 모든 수사기록엔 통화내역 확보와 위치추적을 위해 법원으로부터 받는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요청서’가 딸려 있다”고 말했다.
[#11] 생명을 구하는 휴대전화 = 지난 4일 새벽 이아무개(57)씨는 약을 먹고 죽겠다는 여동생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119에 신고해 동생을 구했다. 올해 1~7월 119에 접수된 휴대전화 위치확인 건수는 1만977건.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위치추적을 해도 오차가 500m~1㎞ 정도 되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도심 지역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찾기 어렵지만 건물이나 인구가 적은 지방에서는 위치추적으로 생명을 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12] ‘빅 브러더스’의 장난감 = 지난 8월 케이티 로지스의 운송직원이던 하선화(24)씨는 근무지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회사가 하씨의 해고사유라며 건넨 2장의 문서에는 하씨의 위치가 분단위로 표시돼 있었다. 회사의 ‘감시’는 휴대전화 위치추적으로 이뤄졌다. 회사는 직원들의 동의를 받아 위치추적을 한다고 설명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많은 택배 노동자나 대기업의 애프터서비스 노동자들에 대해 회사들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위치추적을 하고 있어 인권침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13] 휴대전화 컨닝수법 해외로 수출? =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달 “영국 학생들이 계산기를 사용한다는 핑계로 휴대전화를 꺼내 엠피3 녹음자료와 메모 기능을 이용해 컨닝을 했다”며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국에서도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2004년 대입 수학능력시험에서 문자메시지로 답을 주고받는 최첨단 부정행위가 일어난 바 있다. 첨단 부정행위 수법이 매우 초보적인 형태로 영국에 수출된 셈이다. 경기 구리시 수택고등학교 강성원(33) 교사는 “수능 사건 이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도 학생들의 휴대폰을 거둬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본 사례들처럼 휴대전화 문화는 우리의 일상을 다채롭고 편리하고 재미있게 변화시켜왔지만, 삶의 깊이를 키우는 데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지하 시인은 “수화량·발화량이 워낙 많다보니 앞으로 휴대전화 문화에서는 가볍고 단순한 내용 뿐 아니라 실존적인 고뇌나 깊이를 담은 콘텐츠가 필요하다”며 “멀티미디어로의 지향과 함께 신화, 고대사, 중세의 역사·예술에서 콘텐츠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기태 호남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말을 주고받는, 본원적인 소통의 방식을 조금씩 파괴하고 있다”며 “휴대전화 시장 공략을 위한 연구를 벗어나, 소통의 변화 양상에 대한 이용자 중심의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 ‘연결’ 안되면 불안, 관계의 깊이 고민할때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휴대전화를 쓰게 되면서 우리는 어디로 이동하든 서로 연결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 편리의 이면엔 단절과 파괴라는 어두운 면도 도사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 놓이면 더욱 외로워진다. 휴대전화에 일상이 방해받는 걸 원하지 않으면서도 벨이 울리지 않으면 허전해진다. 홀로 있음을 견뎌내지 못하다 보니 스스로의 내면을 풍요롭게 할 기회가 사라진다. 관계의 가능성은 열려 있되 개인의 감정은 더욱 빈곤해지는 것이다.
김찬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사람들이 다른 이와 연결돼 있는 것 자체에서 안정감을 얻다 보니 소통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공허한 메시지를 남발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자극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휴대전화 문화는 우리의 일상을 다채롭고 편리하고 재미있게 변화시켜 왔지만, 삶의 깊이를 키우는 데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지하 시인은 휴대전화로 지금처럼 짧고 간단한 단문만을 주고받는 문화는 한계가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수화량·발화량이 워낙 많은 까닭에 앞으로 휴대전화 문화에서는 가볍고 단순한 내용뿐 아니라 실존적인 고뇌나 깊이를 담은 콘텐츠가 필요하다”며 “멀티미디어 지향과 함께 신화, 고대사, 중세의 역사·예술에서 콘텐츠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신재 김기태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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