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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첩자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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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산벌>에선 그동안 사극에서 좀처럼 다뤄지지 않았던 존재가 등장하여 눈길을 끌었다.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첩자가 바로 그들이다! 최근 고구려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에선 우리가 놓치고 지나갔던 첩자들의 이야기를 짚어낸다. ‘세작’과 ‘향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들은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제껏 우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훌륭한 장수들에 대한 기록만 재생산해왔을 뿐 그들의 배후에서 한 국가의 흥망, 나아가서는 국제정세의 판도까지 변화시킨 첩자들의 역사는 다룬 적이 없다. 첩자 활동의 은밀성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명분을 중시했던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첩자들의 내밀한 활동을 경시했던 것이다.

 

우리 삼국시대의 역사를 보면, 기록상으로 전문적인 첩자 이론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첩자 활동의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대단히 치밀하고 다양하며 생동감 넘치는 첩자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병법서의 바이블로 불리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핵심적 이론과 사상을 실전에 활용한 사실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는 삼국이 모두 첩자 이론과 활용에 관해 탄탄한 지적 기반을 갖추었다는 방증이다.

 

「삼기사기」「자치통감」판본 : 삼국시대 첩자에 관한 기록들은 단편적이지만 이들의 활약상을 역사로 재구성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사진은 첩자의 활약상을 전하는 「삼기사기」와 「자치통감」판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기록으로 남은 삼국시대 전쟁 횟수는 약 460회에 이르며, 그중 삼국 간의 전쟁은 약 275회로 전체 전쟁의 6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시대 역사를 대략 700년으로 볼 때 1.5년에 한 번 꼴로 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전쟁까지 포함시킨다면 거의 1년에 한 번은 전쟁을 벌였다는 단순한 계산이 나온다. 특히,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성되면서 전쟁의 양상은 국제전으로 변모했고, 이에 따라 전쟁의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그 규모도 전례 없이 커졌다. 이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합할 때까지 전쟁이 안 일어난 해는 거의 없었다. 7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전쟁은 첩자의 온상이며, 첩자는 전쟁의 산물이다. 100년에 걸친 전쟁사는 바꿔 말하면 첩자의 역사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첩자들의 활약상이 대부분 7세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국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상대국에 침투하여 첩자 활동을 펼쳤다

 

 

원효와 의상, 첩보 혐의로 구금

 

삼국 간의 군사 충돌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7세기 중반, 정확하게는 650년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이 당으로 불법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두 사람은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를 구분 지었던 요동 지역으로 길을 잡아 나가던 중 국경을 지키던 고구려 군사에 의해 수십 일 동안 감금당한다. 당나라행은 물론 무산되었고, 둘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신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들의 발목을 붙잡은 혐의란 것이 뜻밖에도 ‘첩자’였다.

 

얼핏 뜻있는 종교인이 구법 과정에서 당한 시련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하다. 하지만 관심의 초점을 구법승 두 사람이 아닌 그들에게 씌워졌던 ‘첩자’라는 혐의에 둔다면 우리 고대사 연구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뜻밖의 흥미진진한 연구거리와 조우할 수 있다. 바로 ‘첩자’라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역사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조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개인이나 집단은 물론 한 나라의 운명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650년 첩자 혐의를 받고 수십 일 동안 구금되었던 두 승려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4 의해 제5 ‘의상전교’)에 남아 있으며, 두 승려는 다름아닌 원효와 의상이었다

 

 

스스로 첩자가 된 을지문덕

 

살수대첩은 고구려의 치밀한 작전의 승리이자 을지문덕이란 명장의 심리전과 기만술 등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첩보전의 승리다. 을지문덕은 스스로 첩자로 분해 적진에 뛰어들기도 하고 거짓으로 항복하기 전에 수나라 장군의 마음을 떠보는 등 최고 수준의 교란전술과 용병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고구려와 수의 제2차 전쟁은 그 규모가 가장 컸고 또 가장 중요한 정쟁이었다. 1차 전쟁을 겪으면서 고구려는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한 상태였고, 수는 양제 개인의 성격적 결함과 서역에서의 성공 등에 자만하여 결국 대세를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전 준비는 물론 전략과 전술 등 모든 면에서 고구려는 수를 압도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고구려가 일찍부터 수의 변경에서 활발한 첩자 활동과 첩보전을 벌여왔다는 사실과 수나라 내부 고위관리를 포섭하여 내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을지문덕이 서슴없이 수 군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첩자 활동과 첩보에 따른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여기에 활용 등 을지문덕의 능수능란한 용병술이 가미되어 고구려는 완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서 말한 귀신 같은 책략’ ‘기묘한 계책은 고스란히 을지문덕에게 돌아가야 할 대목있었던 셈이다. 

 

 

승려 첩자, 도림

 

고구려의 장수왕은 즉위 63년째인 475 9월에 3만 명의 병력으로 백제를 기습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수도 한산을 점령했다. 백제는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런데 백제의 이 치욕스러운 패배의 이면에는 한 승려가 있었다. 그는 고구려가 치밀하게 준비한 백제 공략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첩자였다. 장수왕은 첩자를 모집했고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조국 고구려를 위해 첩자를 자원했다. 그는 죄를 짓고 고구려에서 도망쳐 온 것처럼 꾸미고 개로왕의 취미인 바둑으로 접근하여 신임을 얻은 다음, 현란한 말솜씨로 각종 대형 토목사업을 부추겨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개로왕은 말할 수 없는 후회와 함께 첩자 도림을 저주하면서 죽어갔다. 이 사건은 첩자 한 사람이 한 국가를 멸망의 문턱까지 몰고 갈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신념의 화신, 박제상

 

신라 눌지왕의 동생들을 구하고 장렬하게 죽은 영웅 박제상은 사실 첩자였다. 그는 변복과 잠입으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었던 복호를 구해왔다. 그리고 왜국에 붙잡혀 있는 미사흔을 빼내오기 위해 자신을 고국을 배반한 자로 꾸며 왜로 건너갔다. 화려한 언술로 왜왕을 안심시킨 박제상은 미사흔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키며 첩보술을 훌륭하게 구사한 전형적인 첩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첩보술의 전문가, 김유신

 

신라의 명장 김유신은 침투 간첩 조미곤을 통해 백제의 최고위층 실세인 좌평 임자를 포섭하여 백제 정권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였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조미곤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다가 도망쳐온 인물이었다. 김유신은 이 조미곤을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훈련시켜 다시 임자에게 보내 그를 포섭하게 하는 완벽에 가까운 첩보술을 구사하고 있다. 백제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무너진 것은 신라의 첩보망이 백제 지배층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치정을 역이용한 모척

 

김춘추로 하여금 목숨을 건 고구려행을 감행하게 만든 642년 백제와 신라의 대야성 전투도 그 실상을 파고들면 치정과 그것을 이용한 첩보전이 핵심이다. 대야성 성주였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막료 검일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백제의 첩자 모척은 김품석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검일을 포섭?매수하여 내통함으로써 대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김품석과 그 가족을 몰살했다. 대야성 전투로 야기된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궁극적으로 나? 연합을 이끌어냈고, 나아가서는 신라가 삼국통합에 박차를 가하게 됨으로써 삼국은 물론 당시 국제정세의 판도 변화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렇듯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첩자들이 가장 왕성하고 눈부시게 활약하던 시기였다. 승려들까지 첩자로 활용할 정도로 첩자전이 치열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삼국은 모두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총력전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첩보와 그를 통한 정보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삼국은 첩자 침투와 첩보를 쉴새없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첩자들의 무대는 삼국에만 한정되지 않고 수.당을 축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상 여부에 따라 한 개인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국가의 흥망이 좌우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국제정세의 판도까지 변화시켰던 것이다.

 

첩자의 역사는 동서양 모두 4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수천 년 전부터 오늘날과 거의 다를 바 없이 많은 유형의 첩자들이 기발하고 다양한 첩보술로 무장한 채 종회무진 활약했다. 그리고 우리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서로를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성에 깊숙이 개입했던 삼국시대 각국이 아주 폭넓게 첩자를 활용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다. 우리의 첩자 역사가 2천 년이나 된다는 점도 새삼스럽다.

 

동서양 첩자의 역사를 훑어보면, 기원은 비슷하지만 그 이후의 전개상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스파이’ 역사는 고대 이후로 2천 년 가까이 단절된 상태였다. 물론 그 사이 스파이가 없었다거나 그들이 활동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기록상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동양, 특히 중국 ‘첩자’의 역사는 역사적 실체로나 기록으로나 상당히 풍부한 자료를 남기고 있다. 고대사만 놓고 볼 때 우리 기록은 중국과 비교하면 빈약함을 면치 못하지만 서양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서양의 본격적인 스파이 역사가 16세기 내지 17세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면, 중국은 그보다 2천 년 이상 앞선 전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기원 전후로 시작되어 7세기 때 절정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절정기로만 따져도 서양에 비해 1천 가까이 앞선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첩자의 역사에 관한 한 우리 고대사는 논의할 여지가 많은 시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