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의 첫 홈런, 이종도 만루홈런에 관중들 열광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현 동대문구장) 매표소 앞은 이른 아침부터 입장권을 구입하려는 관중들로 인산 인해를 이뤘다.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청와대 경호실 소속 경호원과 경찰들이 눈을 부라리며 감시의 눈초리를 빛내고 있었다.
프로야구 개막전은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시구로 막이 오를 참이었다. 때문에 만일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대통령의 경호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경계 경호는 프로야구가 개막되기 며칠 전부터 서울운동장 일대에 펼쳐진 상태였다.
프로야구 개막전은 서울을 연고지로 한 MBC 청룡과 대구 및 경북지역을 연고지로 한 삼성 라이온즈가 맞붙었다. MBC는 일본 프로야구 긴데스 버팔로스에서 은퇴, 금의환향한 백인천(白仁天)을 사령탑으로 이재환(李在煥), 유백만(兪百萬) 코치를 비롯해 선수로는 김인식(金仁植·3루수) 송영운(宋榮雲·중견수) 김용윤(金容允·1루수) 유승안(柳承安·포수) 백인천(지명타자) 이종도(李鍾道·좌익수) 신언호(申彦皓·우익수) 정영기(鄭永基·유격수) 조호(趙澔·2루수) 이길환(李吉煥·투수) 등이 선발로 출전했다.
삼성은 대구및 경북지역의 고교야구 대부인 서영무(徐永武)를 감독으로 임신근(林信根)과 우용득(禹龍得)이 코치를 맡았고, 천보성(千普成·3루수) 배대웅(裵大雄·2루수) 함학수(咸學洙·1루수) 이만수(李萬洙·포수) 송진호(宋鎭浩·좌익수) 허규옥(許奎沃·우익수) 김한근(金漢根·지명타자) 서정환(徐定煥·유격수) 정구왕(鄭邱旺·중견수) 황규봉(黃圭奉·투수) 등이 선발로 출전한 선수들이었다.
<사진 설명> 82년 3월 27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 야구장(현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식 장면. OB 베어스의 주장 윤동균이 선수 선서를 하고 있다.
오후 2시24분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에 이어 삼성의 선공으로 막이 오른 개막전은 1회부터 난타전이었다. 9회까지 이만수에 이어 백인천, 유승안 등이 홈런을 주고 받은 끝에 7-7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승부는 10회 연장전에서 이종도의 홈런 한 방이 승패를 갈라 MBC가 11-7로 승리한 가운데 막이 내렸다. 이종도는 7회부터 구원 등판한 이선희(李善熙)를 적극 공략, 만루 상태에서 한방을 날려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장쾌한 만루 홈런을 첫 번째로 기록한 주인공이 됐다.
개막전은 한 마디로 말해 대성공이었다. 특히 이만수의 첫 안타와 첫 홈런에 이어 이종도가 터트린 만루 홈런은 프로야구 인기몰이에 크게 한 몫을 해내, 국민 스포츠로 각광을 받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런 프로야구도 한 때는 군부 독재의 정치적 부산물로 태어났다 해서 눈총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지금도 프로야구 탄생에 얽힌 아리송한 의문들은 속 시원히 풀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있다.
<사진 설명>프로야구 개막식이 끝난 뒤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를 하기 위해 경호원들과 6개 구단 주장들에게 둘러싸여 서울운동장 야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설명> 2시24분 마운드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이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왼쪽에서 3번째)와 유창순 국무총리(왼쪽에서 4번째) 및 OB 베어스 박용곤 회장(왼쪽에서 6번째)이 지켜보는 가운데 볼을 힘차게 던지고 있다.
정말 프로야구는 어떤 의도에서 이 땅에 선을 보인 것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당시 대통령 비서실 교육 문화 담당 수석 비서관으로 프로야구 탄생을 주도했던 이상주(李相周) 박사(현 성신여대 총장)를 만났다. 그가 울산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91년 11월 6일이다. 오전 10시 총장실에서였다.
이상주 박사는 서울대 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80년 9월 15일 청와대의 부름을 받아 교육 문화 및 체육 종교 담당 수석 비서관을 맡았다. 야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시절. 한 때 선수로 뛴 일이 있어 야구가 어떤 것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구에 맛을 들인 것은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수학할 때 메이저 리그를 접하면서였다.
월요일 마다 틈만 나면 으레 야구장에서 살았다. 유학생 신분에 무슨 돈이 그리 많아 매주 야구장을 찾았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월요일 일찍 야구장엘 가면 공짜 표를 얻을 수 있었다.
"프로야구 창설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11인 수석 비서관들이 초안을 만들어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전 대통령은 축구의 열렬한 팬이다. 육사시절 수문장(골키퍼)을 맡았던 탓으로 야구보다 축구를 아주 좋아했다. 전 대통령의 지시가 사실이라면 프로야구보다 프로축구가 먼저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먼저 빛을 봐 대통령의 지시로 태어났다는 것은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프로야구가 거론 된 것은 5월 초순께였던 것 같다. MBC·경향신문이 창사 20주년 기념으로 독립기념관 건립과 프로야구 팀 창단을 발표하기 전이었으니까 그 때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느 날 점심 때였다. 11인 수석 비서관들이 식사를 함께 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이 얘기 저 얘기를 잡담처럼 나누다 프로 스포츠 창설에 의견이 모아졌다. 모두들 대 찬성이었다. 빨리 프로 스포츠를 출범시켜 정치에 관심 많은 우리 국민들의 의식을 돌려보자고 했다.
마침 5·18 광주민주화항쟁 1주년을 앞두고 있어 스포츠의 프로화는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봤다. 특히 이학봉 민정 수석 비서관은 누구보다 프로야구 창설에 아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학봉 수석은 야구가 교기인 경남고 출신이어서 야구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고교야구를 프로야구에 접목시킬 경우 성공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로 내다 보았다.
"미국에서 교육을 마친 뒤 한 때 뉴욕교육청에 근무한 일이 있다. 커피 타임 때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풋볼(미식 축구)이나 베이스 볼(야구)로 얘기 꽃을 피웠다. 그런데 우린 모여 앉았다 하면 정치 얘기 아니면 친구나 상사를 도마에 올려 놓고 난도질을 치든가 '고 스톱'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마땅하게 즐길 오락이 없었던 탓이다. 이런 이들을 위해 건전한 오락을 개발할 필요가 있어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프로야구를 창설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나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야구에 대한 자료를 모았지만 역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루는 실무자가 "혼자서 고민할 게 아니라 야구계 인사들을 만나 보는 게 어떠냐?"고 귀 뜸을 해줬다.
바로 그 거였다. 떠오른 인물이 경남중학 후배로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고 있는 박영길(朴永吉)이었다. 그를 즉각 불렀다. 또 한 명 있었다. 축구협회 최순영(崔淳永) 회장이다.
최 회장은 왜 불렀을까? 이상주 수석, 아니면 11인 수석 비서관회의에서 야구의 프로화가 집중적으로 거론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축구의 프로화도 함께 추진됐던 것 같다. 이 같은 사실은 박영길의 증언에서 엿볼 수 있다. (홍순일/news@photo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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