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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같은 골프 접고 사라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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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대담] 박세리 "목숨같은 골프 접고 사라지려 했어요"

[일간스포츠 최창호]

"목숨같은 골프 접고 사라지려 했어요"

"골프를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다. 나에게서 골프를 떼어내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은 의미였다. 그만큼 힘들었다."

박세리(29·CJ)가 지난 1년 6개월 동안의 장기슬럼프 때 겪은 참담했던 심정을 일간스포츠(IS)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밝혔다.

10월 말 한국에서 열린 LPGA투어 코오롱-하나은행챔피언십에 출전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5일 미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유성 집에서 만난 박세리는 “그때는 정말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 했다”고 토로했다.

"지난 6월 맥도널드LPGA챔피언십 우승은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린 시발점이었다”라는 박세리는 “우승했다는 현실보다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내가 23번의 우승트로피를 받는 동안 눈물을 흘린 것은 단 두 번뿐이다. 1998년 US여자오픈 때와 지난 6월 우승 때이다. 그 눈물은 나를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그때를 되새겼다. 다음은 박세리와의 일문일답.


-지난 1년 6개월여 동안 ‘골프여왕’ 박세리는 없었다. 그때의 심정은.

“내 골프인생에서 그 시간은 최악이었다. 성냥개비처럼 확 타버리면 다시 켜면 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불을 켰는데도 꺼질듯 말듯 그렇게 위태로웠다. 아예 확 꺼지든가, 아니면 훨훨 타든가 해야 하는데 꺼지지도 그렇다고 훨훨 타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답답했다. 연습량으로만 따진다면 원하는 것을 다 가져야 했다. 연습장에서는 빨래줄 같은 타구도 코스에만 들어가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심정은 아무도 모른다.”

-무엇이 ‘천하의 박세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욕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동안 ‘무조건 우승이어야 한다’는 덫에 사로잡혀 있었다. 1998년 LPGA투어에 입성했을 때 ‘박세리의 우승은 한 10년쯤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해 두 차례나 메이저대회(맥도널드LPGA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승승장구하자 ‘출전=우승’이라는 등식의 노예가 된 것 같다. 더 잘해야 한다는 욕심은 또다른 욕심을 낳았고, 그 욕심은 내 자신을 옭아매는 덫이 되고 말았다.”

-슬럼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부모님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한 순간 정말 너무너무 힘들어서 죽음까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배짱이 없었다. 어느 한 순간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가슴 속에는 항상 ‘왜’라는 질문만이 맴돌았다. 무엇보다 ‘주말골퍼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힐난은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의지를 꺾는 ‘독약’ 같은 얘기였다. 하루하루가 눈물이었다. 누군가 와서 바람 좀 쐬러가자고 해도 귀에 들리지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없어졌으면 하는 등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얼마든지 헤쳐나갈 자신과 용기가 생겼다.”

-영원한 골프스승 아버지(박준철씨)와의 갈등은 없었나.

“갈등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뭣하다. 하지만 볼을 못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빠 얼굴이다. 그건 ‘부담 만배’다. 옆에서 그 누가 잘 친다 못 친다고 해도 부담이 없다. 그런데 어휴~(박세리는 심호흡을 길게 했다). 아빠 얼굴만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 전화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지난 한 해 아빠와 많이 다퉜다. 아빠의 강압적인 방법은 문제가 있다.(이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는 ‘이제 컸다고 자꾸 그러는데, 아빠 방법이 잘못된 거야? 그래도 그 속에서 네가 성장했잖아’라며 딸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동안 아버지의 주문은 어떤 것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조언은.

“지난 3월 말 부모님이 미국으로 건너와 제일 유명한 심리학 박사를 찾아 심리상담을 받자고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제안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심리상담이지 정신과상담 아닌가. 썩 내키지 않았다. 가족회의에서 아빠는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세리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일 수 있다. 그러니 세리만 남겨놓고 모두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동안 곁에서 도움을 줬던 언니·동생 모두 서울로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됐다. 그 이후 2개월여 만에 우승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지만 그때 아빠는 이런 얘기를 했다. ‘장사도 매일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은 100만원을 팔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비가 와서 한 푼도 벌지 못할 때가 있다. 골프도 마찬가지다는 그 말씀에 공감이 갔다.”

-슬럼프 탈출과 우승에 특별한 비결이 있는가. 스윙 변화 때문인지 궁금하다.

“혼자 남겨지자 조금은 불안했고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근데 참 이상했다. 그 전에는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젠 혼자서 가야한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올해 우승하자고 생각지는 않았다.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부문에서 ‘톱10’ 안에만 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카리 웹이 지난 4월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챔피언십에서 22개월 만에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어떤 믿음을 갖게 됐다. 하지만 LPGA투어 첫 우승기록을 세웠던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웹을 상대로 연장전 승리를 거둘 줄 몰랐다. 11번홀까지 스코어보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선두인지도 몰랐다. 스윙의 어떤 변화도 없었고 슬럼프 탈출의 비결도 없다. 멘탈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23번째 우승을 하면서 ‘우승이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웹에게 고맙거나 미안한 생각은 없는가. LPGA투어 통산 23승 가운데 다섯 차례가 연장전 우승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중 세 차례가 웹을 상대로 우승한 것이다.

“그게 사실인가. 솔직히 잘 몰랐다(웃음). 그런 점을 떠나 개인적으로 웹에 대해 고마운 생각을 갖고 있다. 웹도 2년여 동안 큰 시련을 겪었다. 그 때문인지 동병상련의 마음이었다. 웹의 우승은 내 일 만큼이나 기뻤고 큰 자극제가 됐다. 웹은 연장전에서 자신을 꺾고 우승한 나에게 ‘네가 다시 돌아와서 기쁘다’는 말로 축하해줬다. 그의 프로 정신에 감사한다. LPGA투어에 몸 담은지 9년여의 시간 동안 가장 행복했고,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함께 한 경쟁자이자 동료이고 친구였다. 웹의 우정을 떠나서 지난 6월 맥도널드LPGA챔피언십의 우승은 바로 내 자신에게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준 대회다.”

-새롭게 눈을 뜨는 박세리를 보는 것 같다. 나름대로 얻은 소득이 있다면.

“정말 많다. 그동안 많이 잊고 지낸 것들이며 제일 큰 소득은 ‘작은 것에 행복하고 감사하게 됐다’는 것이다. 첫째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화목해 행복하다. 둘째 힘들고 어려워도 원하는 골프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셋째 나를 사랑하는 많은 팬이 있다는 사실에 또다른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결혼하고 싶은데 저를 여자로 봐줄 남자 없나요"

인터뷰 말미에 ‘옛 모습을 되찾은 박세리를 만나게 돼 즐겁다.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제 시집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결혼 얘기는 좀 껄끄러운 질문 같아 묻지 않았는데 먼저 꺼내다니. 이에 “벌써 시집을 가려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박세리는 “나이가 몇인가. 계란 한 판이다(서른살이라는 말이다. 박세리는 내년이면 만 30살이고, 한국 나이로는 31살이 된다). 어떻게 벌써라는 말을 하는가. 할머니 되어서 가란 말인가”라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당장 급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결혼할 마음의 준비가 돼 가고 있는 것 같다. 그전에는 ‘결혼’에 대해 생각지 않았고 또 결혼하고 싶어도 남자들이 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게 큰 걸림돌이다”라며 웃었다.

박세리는 “슬럼프를 겪으면서 결혼 상대는 연상이면서 친구처럼 나를 위해 줄 사람이면 좋겠구나고 생각했다”며 자신의 이상형을 밝혔다. “나를 여자로 봐줄 수 있는 그런 남자를 찾을 수는 있을까”라고 웃는 박세리의 얼굴이 무척 고와 보였다.

유성=최창호 기자 [chchoi@ilgan.co.kr]